5060 시 , 소설

타임머신은 렌탈이었다

슈빈이 아빠의 일상 2026. 9. 5. 18:43

병철은 은퇴한 지 석 달째였다.

처음 한 달은 좋았다. 늦잠도 자고, 낮에 목욕탕도 가고, 아내한테 "오늘 점심 뭐 먹지?"라고 물어볼 수 있는 자유가 이렇게 짜릿한 줄 몰랐다. 그런데 두 달째부터 아내의 표정이 조금씩 굳기 시작했다. "오늘 점심 뭐 먹지?"라는 말을 하루에 세 번쯤 듣다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래서 병철은 요즘 스마트폰을 붙잡고 산다. 정확히는 동네 복지관에서 배운 중고거래 앱을. 아직 손가락이 화면을 시원하게 못 따라가서 자꾸 엉뚱한 걸 누르지만, 그래도 이제는 "삽니다" 버튼 정도는 헷갈리지 않고 누를 수 있다.

문제는 그날 밤이었다. 평소처럼 등산화나 볼까 하고 앱을 켰는데, 낯선 게시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급처] 타임머신 팝니다. 상태 매우 좋음. 직거래만.

병철은 껄껄 웃었다. "요즘 애들은 별걸 다 파는구먼." 그러다 문득 손가락이 제멋대로 "채팅하기"를 눌렀다.

"진짜 되는 겁니까?" 병철이 물었다.

"그럼요, 아버님. 저희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물건인데 이사 가면서 정리하는 거예요. 15만 원에 드릴게요."

병철은 잠시 고민했다. 15만 원이면 손주 용돈으로도 애매한 돈이다. 하지만 젊은 시절, 첫 직장 면접에서 넥타이를 반대로 매고 들어갔던 그 순간을 떠올리자 손이 먼저 "구매 확정"을 눌렀다.

물건은 정말 왔다. 전자레인지만 한 회색 상자였는데, 겉면에 스티커로 "○○렌탈"이라고 적혀 있다가 반쯤 뜯겨 있었다. 병철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요즘 다들 스티커 안 떼고 팔더라."

버튼을 누르자 눈앞이 하얘지더니, 정신을 차려보니 병철은 낯선 방 안에 서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방 안엔 갓 쓴 남자 여럿이 붓글씨를 쓰고 있었다. 병철은 조용히 창밖을 봤다. 초가지붕. 소달구지. 저 멀리서 "이리 오너라!" 하는 외침.

"조선시대잖아!" 병철이 소리쳤다. 순간 방 안의 모든 붓이 멈췄다. 갓 쓴 노인 하나가 병철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근엄하게 말했다.

"게 무슨 해괴한 옷차림이오. 그 신발은 또 뭣이오?"

병철이 신고 있던 건 등산화였다. 그것도 밝은 형광 초록색. 병철은 얼른 버튼을 다시 눌렀다. 화면이 또 하얘졌다.

이번엔 성공이다 싶었는데, 눈을 떠보니 군대 내무반이었다. 그것도 자기 자신의 신병 시절. 스무 살짜리 병철이 관물대 앞에서 각을 잡고 있다가, 예순셋의 병철을 보고 기겁을 했다.

"누, 누구세요? 여긴 통제구역인데!"

"어... 나는... 그... 위생병?"

"위생병이 왜 등산화를 신어요!"

병철은 다시 도망치듯 버튼을 눌렀다. 세 번째로 눈을 떴을 땐 익숙한 골목이었다. 낡은 다세대주택, 빨래가 널린 옥상. 그리고 저 앞에서 한 젊은 여자가 장바구니를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병철의 심장이 철렁했다. 스물다섯의 아내였다.

젊은 아내는 병철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누구세요? 왜 자꾸 이 골목에서 마주치세요? 아까도 보셨잖아요."

'아까도?' 병철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 기계, 같은 순간을 자꾸 재활용하고 있었다. 렌탈업체에서 이미 수십 번 대여했다가 반납된 물건인 게 틀림없었다. 신품이 아니라 만신창이 리퍼비시였던 것이다.

병철은 젊은 아내에게 뭐라도 멋진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에서 나온 건 이거였다.

"저기... 나중에 결혼하게 될 사람 성이 강씨입니까?"

젊은 아내는 기접해서 장바구니를 떨어뜨리고 뛰어가 버렸다. 병철은 땅에 떨어진 두부를 주워 담아주고 싶었지만 그럴 새도 없이 기계가 다시 삑삑거렸다. 배터리 부족 경고음이었다.

"안 돼, 안 돼, 조금만 더!"

하지만 기계는 매정하게 마지막 불빛을 하얗게 뿜어냈다.

정신을 차려보니 병철은 자기 집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TV는 꺼져 있고, 손엔 회색 상자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 상자 위엔 반쯤 뜯겼던 스티커가 이제야 완전히 떨어져서, 원래 문구가 다 보였다.

"○○렌탈 – 사용 후 반드시 반납 요망. 배터리 1회 충전당 3회 한정."

병철은 허탈하게 웃었다. 이걸로 인생을 바꿔보겠다고 15만 원을 썼다니.

그때 안방에서 아내가 나왔다. 예순한 살의, 두부 사건 따위는 기억도 못 하는 지금의 아내였다.

"뭐 해요, 그렇게 웃고 앉아서? 저녁에 뭐 먹을지 생각 좀 해봐요."

병철은 상자를 슬그머니 발로 밀어 소파 밑에 감췄다. 그러고는 아내를 향해 씩 웃었다.

"여보, 나 오늘 진짜 대단한 걸 깨달았어."

"뭘 깨달았는데요."

"당신이 스물다섯 살 때도 예뻤고, 지금도 예쁘다는 거."

아내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병철을 흘겨봤다. "됐고, 저녁 뭐 먹을지나 말해요."

"짜장면 어때?"

"어제도 짜장면 먹었잖아요."

"그럼... 짬뽕?"

병철은 생각했다. 조선시대도 가봤고, 군대도 가봤고, 심지어 아내 스무 살 시절까지 만나고 왔는데, 정작 오늘 저녁 메뉴 하나를 못 정해서 쩔쩔매고 있다니. 인생이라는 게 참 신기했다.

그는 소파 밑의 상자를 다시 한번 흘긋 봤다. 배터리는 이제 완전히 방전됐을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바꾸고 싶은 과거 같은 건, 이제 딱히 없었으니까.

"짬뽕으로 하자, 여보."

"진작 그럴 것이지."

병철은 웃으며 일어섰다. 오늘 하루도, 지금 이대로도, 나쁘지 않았다.

끝.